2021 2W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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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에 관한 이야기


경재력에 비해 행복도가 유달리 낮다는 우리나라.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만연한 단체 주의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개인 대산 단체가, 취향 대신 유행이 우선하는 우리 사회에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숨어있는 개인의 취향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21년, 2W 잡지에 취향에 대한 글과 그림을 연재했습니다. 취향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글과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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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찾기에 방해가 되는 것 - 지금 수고롭지 않은 여자, 모두 유죄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 있다. 그중에 한 가지를 꼽자면 ‘고생했다’‘수고했다’라는 칭찬이다. 분명 칭찬 인데, 나는 이 말이 이상하게 입에 잘 붙지도 않고 하기도 꺼려졌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고생’의 가치가 유난히 높은 이유

‘고생했다’라는 말은 보통 윗사람들이 아랫사람의 노고를 인정할 때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쓰지 못 하는 말이다. ‘고생했다, 수고했다’라는 말은 ‘감사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데, ‘감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고, 고마움의 감정이 묘하게 섞여 뉘앙스만 전달한다. ‘고생했다’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치환해보면 이 칭찬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고생(suffering)’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넣어 문장을 만들면, “Thanks for your suffering(당신의 고통에 감사합니다).”라는 괴상한 문장이 만 들어질 뿐, 감사의 의미가 전달되진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고생은 유난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생했다’라는 말이 유난히 싫은 순간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출산 후에 어른들이 ‘고생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갓 출산을 마친 며느리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어른들이 하는 이 말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부부 두 사람의 계획 아래에 진행된 출산에 난데없이 윗어른의 ‘인정’과 ‘감사’가 끼어드는 데 있다. ‘고생’의 가치가 그것을 겪는 당사자가 여자라면 어느덧 마땅히 겪어내야 하는 것쯤으로 가치 절하된 곳이 우리나라이다. 그런데 가사노동과 육아라는 가장 전형적인 돌봄 노동을 오랜 기간 동안 배정받아 온 며느리라는 존재가 마침내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이 장면에서 ’고생했다’라는 말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면에 뭉클함과 동시에 큰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원하지 않아도, ‘고생했다’라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고통은 전시되고, 여자의 경 우 어쩌면 ‘고생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남자들보다 더 큰 고통이 수반되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히 고생하지 않고 ‘꿀을 빠는’ 여자들


너무 비약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꿀을 빤다’라는 말의 존재와 그 쓰임이 이것이 비약이 아님을 알 려준다. ‘꿀을 빤다’라는 말은 ‘고생했다’라는 말과는 반대로 일이나 생활을 쉽게 한다는 말로, 군대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명백하게 너무 편해 보이는 대상에 대한 비꼼의 의미가 담겨있다. 실제로 이 말은 한 칼럼의 제목으로 쓰였는데, ‘아기 엄마들은 왜 백화점에서 꿀을 빨까?’가 바로 그 제목이며, 여기서도 ‘아기 엄마’와 ‘꿀을 빨까’가 나란히 쓰이면서 문장에 대비가 아주 선명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칼럼은 여성들이 아이를 양육하며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글로, 꽤 오래전에 읽었던 글인데도, 강한 제목과 여러모로 인상적이 었던 내용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다. 글쓴이를 포함한 아이 엄마들은 기저귀 교환이 편하고, 아이 용품을 구할 수 있고, 유모차 를 밀고 다니기에 용이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곳이 백화점뿐이라 싫어도 백화점에 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누군 가는 ‘낮 시간대에 고급 유모차 몰고 백화점 나가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떠는 꿀 빠는 아줌마’들이라고 질시하고, 윗세대들은 요 즘 엄마들 편하다고 쉽게 말한다는 것이다. 감히 고생하지 않고 ‘꿀을 빠는’ 여자들은 아니꼬움의 대상이 된다. 편해 보이는 여 자를 향한 비난은 비단, 이 칼럼뿐만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된장녀’, ‘맘충’ 등이 그러하다. 지 금은 많이 바뀌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사회는 젊은이들의 고생을 사서라도 하길 바라며, 특히 여자들에게 고생은 기본적인 상태 이길 바라는 시선이 아직도 존재한다.

내가 감내한 고생은 과연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여러 이유 덕분에(?) 나는 ’고생했다’라는 칭찬과 더 거리를 두기로 했다. 예전부터 꺼림칙했다는 이 칭찬을 은근히 바 랄 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느낌이 좋았고, 나의 유능감, 효능감이 높아지는 것 같아서 좋을 때도 있었 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별로 즐겁지 않은 현재를 참아 낸 후에 받게 되는 평가가 바로 ‘고생했다’라는 말이다.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노력과 함께 약간의 고통이 수반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 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현재를 일부러 희생하는 일을 경계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고생했다’라는 말을 건넬 때, 다시 한번 내가 감내한 그 고생이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찾아보려는 취향 찾기에도 현재를 억누르고 견디는 일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애쓴다’ ‘수 고하다’ ‘고생하다’ 같은 이런 종류의 말을 들었을 때, 늘어지는 고통에 박수받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 다. 고생은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고, 운동할 때만 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