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찾기에 방해가 되는 것 -
지금 수고롭지 않은 여자, 모두 유죄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 있다. 그중에 한 가지를 꼽자면 ‘고생했다’‘수고했다’라는 칭찬이다. 분명 칭찬 인데, 나는 이 말이 이상하게 입에 잘 붙지도 않고 하기도 꺼려졌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고생’의 가치가 유난히 높은 이유
‘고생했다’라는 말은 보통 윗사람들이 아랫사람의 노고를 인정할 때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쓰지 못 하는 말이다. ‘고생했다, 수고했다’라는 말은 ‘감사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데, ‘감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고, 고마움의 감정이 묘하게 섞여 뉘앙스만 전달한다. ‘고생했다’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치환해보면 이 칭찬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고생(suffering)’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넣어 문장을 만들면, “Thanks for your suffering(당신의 고통에 감사합니다).”라는 괴상한 문장이 만 들어질 뿐, 감사의 의미가 전달되진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고생은 유난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생했다’라는 말이 유난히 싫은 순간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출산 후에 어른들이 ‘고생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갓 출산을 마친 며느리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어른들이 하는 이 말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부부 두 사람의 계획 아래에 진행된 출산에 난데없이 윗어른의 ‘인정’과 ‘감사’가 끼어드는 데 있다. ‘고생’의 가치가 그것을 겪는 당사자가 여자라면 어느덧 마땅히 겪어내야 하는 것쯤으로 가치 절하된 곳이 우리나라이다. 그런데 가사노동과 육아라는 가장 전형적인 돌봄 노동을 오랜 기간 동안 배정받아 온 며느리라는 존재가 마침내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이 장면에서 ’고생했다’라는 말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면에 뭉클함과 동시에 큰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원하지 않아도, ‘고생했다’라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고통은 전시되고, 여자의 경 우 어쩌면 ‘고생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남자들보다 더 큰 고통이 수반되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